世;求禮監務 諱溫, 配 淑夫人 珍原田氏之墓         계보 보기

                           소재지;전남 장성군 동화면 용정리 기산마을 서당산(골)  2004년1월11일촬영

              

             

 都先山 龍原齋(求禮公齋室)

                                              소재지;전남 장성군 동화면 용정리 기산마을 서당산아래

       

        

                

 ▣ 龍原齋記(용원재기) 譯文(역문)

       珍原朴氏는湖南(호남)의 明族(명족)인데 先世(선세)에 進士求禮監務 諱溫(진사구례감무 휘온)의 묘소가

     옛 영광의 黃龍里(현 장성군 동화면 용정리)에있다. 往年(왕년)에 내가 그 後孫(후손)의 請(청)으로 그 墓文(묘문)

     記述(기술)하였는데 이제 또 그墓下(묘하)에 있는 용원재에 대한 그 내력의 記錄(기록)을 청해온다.

        그 墓下(묘하)에 옛날에는 齋室(재실)이 없었는데 중년에 이르러 後孫(후손)明煥(명환)이 혼자 힘으로 한채의

     집을지어 齋宿(재숙)하는 곳으로 삼아왔다.얼마후 그곳이 비좁아 여러 昭穆(소목)관계에 있는 자손들이

     모여 앉기가  어렵게 됨에  지난庚子年(경자년)1960년에 종친이 모두 협동하여 다시 四間五楹(사간오영)의 집을

     그 옆에지어 더넓히게 되니 바로 용원재이다.

        公은 진원박씨의 터전을 닦은 문인데 세대가 이미 멀어지고 遺積(유적)이 없어져 德業 (덕업)과事行(사행)에

     대하여 詳考(상고)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아들 直提學 葦南 熙中(직제학 위남희중)이 淸名(청명)과直節(직절)로

     國朝(국조에)名臣(명신)이되어  그 業績(업적)이 크게 나타났으며 손자 세분도 모두 진사에 올랐다.

        그뒤로는 더욱 번성하여 6~7世에 이르러 道學(도학)과 名節(명절)로 著名(저명)한 이도 있고 忠義(충의)로

     드러난이도 있으며 文行(문행)으로 두드러진 사람도 있다. 그밖에 벼슬과 진사에 합격한 자가 五十餘人(50여인)

     이나되어餘蔭(여음)(조상이끼친 공덕으로 자손이 받은복) 이 끝임이 없자 논자들은 或 公(역공)의 묘소가 形家(형가)의

     吉地(길지)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로 세상일에 매우 어두운 말이다. 어찌 公이 남모르는

     가운데 쌓아 놓은  德(덕)들이 오랫동안 발효한 까닭이 아니겠는가 이제 용원이란 이름은 비록 그지명에서 연유한

     것이지만 뜻이 실로 생각해 볼 만하니 이것으로 설명해 보는 것이 옳겠다. 대체로 용이란 잠겨있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는데 짐길 때는 聲色(성색)도 찾을 수 없을 듯하다가 나타나서 비치는 빛이 휘황하게 발산하여

     구름도 일으키고 비도 내려 그 면화를 헤아릴 수 없게한다.

        만일 잠겨 있을 때 길러둔 것이없다면 어찌 나타날 때의 기상이 빼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잠겨있을 때와

     나타날 때는 항상 相補關係(상보관계)여서 잠겨 있을 때가 없으면 나타남도 없는 것이다.

     대체로 선조와 자손은 한 기운이 흐르므로 公이 앞에서 가만히 스스로 보양했던 것을 비유하면 용이잠겨있을

     때이고 자손이 후세에 드러나 크게 출세한 것을 비유하면 용이 나타날 때이다.

     이 처럼 용에다 비추어 보면 공의 덕을 알 수 있겠다.  이 齋室(재실)에 거처하면서 공을追慕(추모)하는 자가

     진실로 그 이름으로 인해서 그 實義(실의)를 생각하여 더욱 그빛의 발산을 구한다면 공의 업적이 없어진 것을

     恨(한)스럽게 여기지 않아도 될 것이며 나는 용원의 용이 將次 天下(장차천하)의 문명를 나타낼 것으로 본다.

     이를  기록하도록 와서 글을 청한 사람은 基柱(기주),重杓(중표)이다.   

         

 ▣ 時際(시제) ;매년 양력 4월 첫째주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