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藝文館 直提學 葦南公諱熙中之墓          2004년1월11일촬영

         (예문관 직제학 위남공 휘희중 지묘)      소재지:전남 장성군 진원면 학림리 학림마을계보 보기

     

     

     

 

葦南先生墓碣銘(위남선생묘갈명) 譯文(역문)

       玄岡(현강)(柳乘유비)進士(진사)는 近古(근고)의信筆(신필)로 선생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때에 살았는데

      이信筆(신필)로얼마 오래지 않은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立證(입증)할 만하다. 그 行狀(행장)에 이르기를

      "名利(명이)에 超然(초연)하여果敢(과감)하게 관직을 물러나 홀로 서서 두려워 하지 않고 世波(세파)를

      피하여 근심함이 없었으니 百世의 스승이 되기에 充分(충분)하다"  

      했는데 지금 五百年(오백년)이나 내려오도록 어린 아이들까지도 선생의 風敎(풍교)을 외우고

      있었으며 無知(무지)한  樵童(초동)이나 牧竪(목수)들도 서로 墓前(묘전)의 나무가 후어지지 않계 바로

      잡아주며 간직 온 것은 그 덕이 바르고 컸었기에 이렇게 오래도록 더욱 빛난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熙運(휘운)좋은시대을  만나 청명한 자질을 타고 났으므로 진사를 거쳐 문과에

      오른다음 淸要顯織(청요 현직)을 두루 거쳐 내직으로 예문관 직제학이 되었고 외직으로는 남원 부사가 되었다.

      이때 碧骨提(벽골제)를 監築(감축)하여 백성들에게 水利(수이)의 혜택을 주고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는 氣節(기절)과 文章(문장)이 뛰어나 島夷(도이) 일본인도 공경하게 되었다.또 왕명을

      받들어 중국에사신으로 다녀왔는데 신명을 다하고 돌아와 예문관 직제학으로 昇進(승진)하였다.

      그런데 당시 執政者(집정자)가 왕명을 함부로 행하자 마침내 그를 彈刻(탄각)하는 上奏(상주)하여

      조정의 기강을 肅正(숙정) 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이움을 받게 되자 퇴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낚시와 술을 즐기며 벼슬을

      버리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히 생활하였다.

      그리하여 후진을 가르치는 것으로 聖上(성상)의 樂(락)을삼으며 "淸白傳家청백전가"라는 글씨를 써서

      후손에게 他(타)의 模範(모범)이되게하고 富貴(부귀)와 利達(이달)에는 깨끗하였다.

      詩(시)와 글씨가 모두 精密(정밀)하여 시가집과 筆苑(필원)이며 淸白錄(청백록)에 수록 되었으며

      佐命功臣(좌명공신)에  들었다. 선생의 諱(휘)는 희중이고 字는 子仁(자인)인데

      生.卒.年.月.日은 家牒(가첩)에도 전하지 않는다.

        系譜(계보)가 珍原人(진원인)인데 고려 대장군 휘 진문이 시조이다.

      그후 三世를 지나 대제학이 된 휘 첨은 증조이며  祖(조)는 절도사 휘 홍서이고 考(고)는縣監(현감)

      휘 온이며 비는 진원전씨인데 대사헌 억이 그의 아버지이다.

      配位(배위)는 영광吳(오)씨로 三男을 두어 暉生(휘생),坤生(곤생),

      進生(진생)이 모두 생원이고 四女를 두었는데 具成義(구성의)와 咸城君(함성군)李從生(이종생)과

      생원 박이공, 정랑 이윤의에게출가했다.

         손자와 증손은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선생의 묘소는 옛 진원군 학림동 後麓(후록)癸坐(계좌)의언덕에

      있는데 그밑에 祠宇(사우)를지어 철향하여 왔으나 묘소에 지금까지 碑劾(비핵)이 없으므로 후손 중기가

      諸宗(제종)들과비을 세울 것을 계획하여 우만에게 銘文(명문) 請(청)한다. 삼가 생각컨데 선생의 언행이

      어찌 이렇게까지 寂寞(적막)했겠는가마는 亂後(난후)에 遺失(유실)되어 주어 모은 것이 얼마되지 않는다.

      伯夷(백이)는 백세의 스승으로 그 風化(풍화)를 듣는 자와 완고한 사내는淸廉(청렴)해지고 게으른 사람은

      뜻을 세우게 되었거니와 梗槪(경개)로 이 비문을 삼았으니 선생을 생상하는데 足(족)할 것이다. 銘(명)에

      이르나니 葦山(위산)의 남쪽에 있는 (葦山之南위산지남) 그 縣(현) 丘珍(구진)에서 은거하여 의를 행하니

      선생이 바로 그사람이고  거친세파에서과감하게 물러나한평생을 보내게 되니 산수에 남긴 풍화,

      이제 오백년이 되었네 위에는 묘소 아래에는 祠宇(사우) 지나는 자 공경하겠네.

    - 丙戌(병술)(1886년) 봄   幸州  奇  宇  萬  (행주 기 우 만) 謹書(근서)       

 

鶴林齋(학림재) 소재: 전남 장성군 진원면 학림리 학림마을

   

鶴林齋移建記(학림재이건기)  譯文(역문)

         호남 장성의 진원에 전부터 鶴林祠(학림사)가 있어으니 일찍이 조선조 肅宗(숙종) 44년 戊戍(진수)

       (1718)에 鄕(향)의 선비들이 故葦南朴公 熙中(고위남박공 희중)을 위하여 書院(서원)을 창건하고

       제사를 드려왔다.

          그 후 서원이 철폐됨에 齋(재)를 두게 되었는데 그것도 백여년이 지났다.

       이제 진원박씨들이 大同譜(대동보)를 수찬하여 여기에 一家(일가)간의 文獻(문헌)이 잘 갖추어지고

       30代나 되는 宗親(종친)들이 단란하게 되었는 바 이에 齋室(재실)을 옛자리의 북쪽 지척의 땅에 옮겨지어

       間數(간수)넓혀 짓고 단장도 곱게 끝냈다.

          本鄕(본향)옥현과 보성의동주가 그 役事(역사) 감독하여 나를 찾아와 移建記(이건기)를써달라고 한다.

       아! 公이 벼슬한 事蹟(사적)은 태종.세종의 兩代(양대)實錄(실록)에 실려 있어 상고 할 수 있거니와 公은

       젊어서 司馬試(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직책을 거쳤는데 創義性(창의성)이 좋고

       處事(처사)에 능력이 많았다.

          일찌기예문관의 직제학으로 있었으며 高陽郡(고양군)堤防(제방)쌓는 일을 돕고 또 敬差官(경차관)이되어

       碧骨堤(벽골제) 개축을 감독하였으며 후에 고향인 호남땅에서는 甲船(갑선)을 監造(감조)하기도하였다.

       또 글씨를 잘써서 河浩亭(하호정)崙(윤)이 그 아버지 묘에 神道碑(신도비)를 세우는데

      下春亭季良(하춘정계양)이 글을 짓고 公이 글씨를 썼으니 浩亭(호정)에게는  다 문하생이었다.

       더욱 외국사행의 능력이 인정되어 典農寺尹(전농사윤)으로서 일본 回禮使(회례사)가 되었는데

       歸任時(귀임시)에는 간사한 倭僧(왜승)을 잡아다가 昌原(창원)에 가둔 일도 있어 士林(사림)이

       壯快(장쾌)히 여겼다.그러나 그 재주를 시기하고 제어하는 이가 많아 결국 크게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니 어찌 아깝지 아니한가? 이 記(기)가 다되니 扁額(편액)"鶴林齋학림재" 세글자를 써달라고 한다.

       암만해도 한몸으로 두일은 감당하기 어려우나 후손의 부탁이 간절하므로 종내 사양치 못하였다.

       乙酉(을유)光復後(광복후) 첫 癸亥(계해)(1983년)단오달 보름지나서

       文學傳士(문학전사) 眞城(진성) 李家源(이가원) 은 삼가 찬한다.

 

鶴林祠 遺墟碑(학림사 유허비)  譯文(역문)

         저 호남 장성의 佛坮山下(불대산하) 학림리에 故(고) 직제학 위남 박공희중의 묘소가 있어 고을의유림들이

       그 아래에 사당을 세우고 제례를 받드니 이름하여 학림사라 하였다. 대개 공은 초서,예서를잘 써서 중국에

       까지 이름을 떨치며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능히 신의를 펴서 太宗(태종)의 큰 신임을 받는 바 되었다.

          그러나 성품이 곧아서 執政(집정)과 거슬리어(河演擅權하연천권)정치에서 물러나 만년을 鄕里(향리)에서

       보냈는데 학문강론으로 뜻을 구하여 이에 후학을 가르치게 되었고 선생 歿後(몰후)에는 鄕社(향사)에서

       享祭(향제)를 받게 되었다, 이윽고 도 麗山君 鶴川 金公 穩(여산군 학천 김공 온)과 右相(우상) 贈職(증직)을

       받은 義城君 孟庵 金公 永烈(의성군 맹암 김공 영렬)이 함께 모셔졌는데 鶴川公(학천공)은  給料官(금요관)

       으로서 太祖(태조)의 威化島回軍(위화도회군)을 도와 原從功臣(원종공신)의 勳封(훈봉)을 받았으며 여러번

       州(주). 郡(군)을 맡아 治化(치화)를 크게 이루고 만년에 시골로 물러나 세상을 마친 분이다.

          孟庵公(맹암공)은 태종때 佐命功臣(좌명공신)으로 勳封(훈봉)을 받고 만년에 물러나 학문을 강론하니

       성리학에 정밀하였다.

          諸公(제공)은 이처럼 시간적으로 선후릐 차가 있고 이룬 바도 엮시 다름이 있지만 청렴한 명망과 만년의

       절개는 맞 겨눌만 하여 모두 세상의 모범이 됨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당은 처음에는 위남공만을 주로

       모셨으나 제공을 아울러 흠모하게 되어 차례로 향사하게 된 것이다.

          그 후에 또 應敎 逝水軒 金公 應斗(응교 서수헌 김공 응두)와 生員 淸溪 朴公 元恂(생원 청계 박공 원순)

       生員 岐陽 朴公 濬哲(생원 기양 박공 준철)그리고 監察 岐湖 李公 文龍(감찰 기호 이공 문용) 과 喚庵 金公

       義瑞(환암 김공 의서)등을 추가로 配享(배향)하엿으니 이 諸賢(제현)들은  다 鶴川(학천).葦南(위남) 두분의

       후손이거나 후학으로서 두분의 風度(풍도)를 일으켰다고 알려진 사람들이므로 다함께 한사당에 모실만 하였다.

          이들 諸賢(제현)의 事蹟(사적)은 비록 자세하거나 간력하며 두드러 지거나 그렇지 못하는 등 같지 않으나

       모두 행의와 풍절이  한 시대에 추앙을 받아 후세에 모범을 세웠고 위엄있고 장한 奉祀(봉사)를 받게 된

       것인즉 그 아름다운 덕과 두터운 명망은 대개 상상해 볼 만한 것으로서 어찌 두분이 남긴 유풍과 여운이

       멀리까지 미쳤다고 하지 않으리오. 또 학천공의 5세손 文正公 河西 金麟厚 先生(문정공 하서 김인후 선생)

       있어 도학의 醇儒(순유)로서 文廟(문묘)에 배향되었고 위남공 6세손으로 文康公 竹川 朴光前 先生(문강공

       죽천 박광전 선생)이 나와 퇴계의 수제자로 일세의 名儒(명유)가 되어 더욱  크게 드러났으니 두분이 길을

       열고 인도한 공은 이에 더 큰 것이 되었으며 흐름을 보아 근원을 아는 것으로 이 사당에 더욱 빛을 낸 것이

       되었다.

          地理誌(지리지)를 살피건데 仁祖(인조)21년 癸未(계미)(1643년)에 처음 彰堂(창당)으로 창건되고 肅宗(숙종)
       44년년 戊戌(무술)(1718년)에 서원으로 승격된 다음 高宗(고종)9년 戊辰(무진)(1868년)에 이르러 나라의

       금령으로 철폐하게 되니 황폐함을 탄식한지가 이미 백여년이 되었건만 예전의 강당은 편액을 바꾸어

       학림재가 되고 다만 박씨일가의 재실 구실을 할 뿐이었다. 이는 사림들도 함께 개탄하는 바인데 하물며

       그 후손들에 있어서랴!

          이때에 이르러 위남공의 후손인 淡柱(담주)가 개연히 그 유지가 영구히 없어질까 염려하여 종친들과

       상의하고 독담으로 비석을 다듬어 遺墟(유허)를 表(표)하게 되니 후손인 基柱(기주),廈柱(하주)가 나에게

       글을 청한다. 내가 말하기를 제공들의 행적이 이미 서책에 드러나 있고 널리 흠모되고 있으니 한 사당의

       흥폐가 제공들의 공적을 높이거나 낮추지는 못할 것이며 또 崇慕(숭모)하는 실제는 마음에 있고 제사의

       꾸밈은 형식에 불과하므로 진실로 그 실이 있다면 외형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별로 한탄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지금은 학림사가 황폐해 있는 것을 차마 두지 못한는 것은 실로 崇慕(숭모)하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참으로 이 마음을 보존하여 잃지 않으면 숭모하는 실이 여기에 있는 것이니 사당이 없더라도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오늘의 美擧(미거)는 바로 이 숭모의 실을 볼 수 있는 것으로 慶賀(경하)할 만한 것이며  또한 글로써

       남길 만한 것이다.

                 --歲幸酉(세행유)(1981년)元春(원춘)  花山  權   龍   鉉 (화산 권 용 현) 述(술)

▣ 時際(시제) ;매년 음력 10월 첫째주 일요일

葦南先生,配 淑夫人 靈光吳氏 之墓

                 (배 숙부인 영광오씨 지묘) 소재:위남선생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