珍原朴氏 中派 13世 (우),號:秋齋(추재)

武繕工監判 겸 僉正  .諡 忠烈      

   

                 호는 추재(秋齋,시호는 충렬(忠烈),조선 무과에 급제하여 선공감판.첨정에

                    이르렀으나 정유재한 때 일본에 잡혀가 21년 만에 예조의 유문을 받고 본국인

                    66명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조총의 제조법이 전해져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忠烈公諱祐墓碣銘(충열공 휘 우 묘갈명) 譯文(역문)

         내 일찌기『姜睡隱(강수은)<강항의호>은 慷慨(강개)<의분이복받쳐 한탄함>하고 忠慣(충관)함이 남다른 분인데

      倭賊(왜적)에게 끌려가 죽지않고 구차하게 살아 나온 것을』疑心(의심)하였더니 그가 쓴 看羊錄(간양록)을 읽고서야

      살아돌아온 뜻을 석연하게 알 게되었다 대개 狼貪(랑탐)<이리와같이탐냄> 한 적과 이웃하게되면 국가에 크게 害(해)가

      되니 그들의風土(풍토)와 민속이며 器械(기계)부리는 기술을 바짐없이 偵探(정탐)하여 見機 應變(견기 응변)하고

      미래에 닥치는 患亂(환난) 予防(여방)하고저 이같이 살아남은 것이다.  戰死(전사)않고 공을 세운 우리 秋齋(추재) 朴公께서

      만든 鳥銃(조총)은 유명하다.  저들 일본의 이른 바 조총제작소는중국에도 없었다.

      중국사람들이 조총을 보고는 飛火槍(비화창)이라고 하여 겁을 먹고 도망하니 壬難(임난)에 실패한 원인이  이때문이다.

      公은 일본땅에 잡혀가 20여년동안을 조총의精巧(정교)함을 터득하고 돌아와 후세의 환난를 막는 利器(이기)로 삼았다한다.

      縣誌(현지)에도 그 내용이 실려 있다.  公에게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여 僉正(첨정)벼슬을 지내고  生卒年月(생졸년월)은

      모르며 묘는 옛 진원 감산의 남향인데 부인 밀양박씨와 同兆(동조)이다<현 무안군 해제면 양매리고읍마을

      분토동으로移葬(이장)>公은 휘는 祐(우) 秋齋(추재)는 호이다.

         아버지  漢懋(한무)는 佐郞(좌랑)을 지내시고 어머니 송씨는 居仁(거인)의 따님이다.祖(조) 昌柱(창주)는 현감이요

      曾祖(증조) 謹之(근지)는 文行(문행)으로 이름나고 진사인데 이분이 위남선생의 손자이다.

      위남선생의 휘는 희중이요 직제학이며 학림사에 配享(배향)되었다.

      진문<고려대장군>이 진원박씨의 시조이다. 有德(유덕)한 분이

      相望(상망)하게 輩出(배출)하였다.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장남 禮福(예복)은 軍功(군공)이 있어 掌樂院正(장락원정)에

      贈職(증직)되고 2남 振福(진복)은 宣傳官(선전관)을 지낸분이고  3남 은 應南(응남)이다..

      손자 以一(이일)은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예복의아들이요 以壽(이수)는 진복의아들이며  以雲(이운) 以伯(이백)

      응남의아들이다. 銘(명)을 지으노니 『異域(이역)땅에 가쳤으나 조죽을 잊지 않았네 오랑캐를 오랑캐 식으로 공격하니

      조총을 만든 법이로다. 요즘 사람들은 나라를 적에게 팔아 넘기니 公의 遺風(유풍)을 듣고 부끄럽지 않으랴

 

 

 

朝鮮國禮曹爲諭文(忠烈公 諱 祐) 譯文(역문)      <종손소장>

         國家(국가)가 不幸(불행)하여  졸지에 兵亂(병난)을 당하니 八道民生(팔도민생)들은 塗炭(도탄)에 빠지게 되고 그중에

      겨우 禍(화)를 免(면)한자들은 또 모두 구금되어 지금 이십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그 중에 어찌 祖國(조국)을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으랴마는  돌아 올 계교를 세워 보았겠으나 逃避(도피)해서 돌아올

      길은 없고 도망쳐 오는 자들은 모두 陷沒(함몰)되어 버렸으며 이미 오랫동안 스스로 빠져나올 계교를 세우지 못하고

      있으니 그 정상이 또한 가련하다. 國家(국가)가 적으로부터 송환된 人口(인구)들에게는 特別(특별)히 寬大(관대)한

      特典(특전)을 베풀기로 하고  丁未年(정미년)<1607>間(간)에 사신을 보내어 포로가 된 人口(인구)들을 통솔해 가지고

      돌아와 모두 免罪(면죄)토록  했으며 役(역)이 메겨진 사람은 면제해 주고 公私賤(공사천)의 職(직)에 있는 자들도 모두

      免賤(면천)하여  完全復歸(완전부귀)케 하며 保護(보호)하여 本土(본토)에서 安着(안착)케하고 歸還(귀환)된 사람들은

      모두 親戚(친척)들을 相逢(상봉)하게 하며 다시故國(고국)의 良民(량민)이되게 했다.  이 사실은 일본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다 듣고 알 게되었는데 하물며 지금은 日本(일본)이 이미 선멸되고 우리나라와 원수이었던 前代(전대)의

      行爲(행위)를 모두 改過(개과)하며 書信(서신)을 보내 協相(협상)을 請(청)하니 國家(국가)에서는 特別(특별)히

      民生(민생) 들로 보아 사신을 보내어 일본에 있는 포로들을  本土(본토)로 生還(생환)케 했다.

         그때 에도 萬若一齊(만약일제)히 돌아오게 했다면 마땅히 왕년에 送還(송환)된 자들처럼 賤職(천직)과負役(부역)을

      免除(면제)해주고 完全復歸(완전부귀)등을 일일히 施行(시행)키로 諭文(유문)이 下達(하달)되어  계획이 전해졌고  

      諭文(유문)이通告(통고)됨에 따라 사신이 돌아올 때 모두 一時(일시)에 나왔더라면 아마 지연될 念慮염려)가 없었을

      것이며 이감의 고혼을 면 할수있었을 것이다. 일의 經過를 보아가지고 시행하기 바라며 필히 이 첩을 전할 것이며

      위의 帖(첩)은 被擄(피로)된 士民(사민)들이 이에 準行(준행)케 한다.

      위 年代(년대)를 詳考(상고)하면 1597년<정유재재난시>에 일본에 被擄(피로)되어 21년뒤인 1617년<萬曆(만력)45년

      즉 광해10년정사년>에 朝廷(조정)에서 내린 이 유문으로 還國(환국)하게 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일본에서

      조총 만드는 법을 傳授(전수)한 공으로 沒後(몰후)병조판서에 追贈(추증)하고 忠烈(충열)의 諡號(시호)를 내렸다 한다.

 

 

  묘지 전경 전라남도 신안군 해제면 양매리 고읍마을 분토동(2004.9.27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