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龍齋(구용재) 諱繼原齋室(휘계원재실)전남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 (감꽂이)계보 보기

九龍齋記(구용재기)

       보성읍에서 동쪽으로 40리에 자리잡은 靑尨山(청방산) 밑에 높이서 있는 九龍齋(구용재)는 진원박씨 생원 진사요

    參奉(참봉)인 繼原(계원)과 진사인 균의 父子(부자)분의 墓下祭閣(묘하제각)이다.뒤로 鷹峰(응봉)을 등지고 앞으로

    龍浦(용포)가 펼쳐 있으며 左右(좌우)로 작은 山峰(산봉)들이 에워싸고 精英(정영)이 음집한 곳이다 風水(풍수)들이

    말한 九龍爭珠(구용쟁주)한 形(형)이라고 한다.옛 제각은 草(초)집에 狹少(협소)함으로 자손들이 급히 謀議(모의)하여

    터를 마련하고 새로 建築(건축)하니 기와로 지붕하고 담장을둘렀다.

       丙申(병신)(1956년)봄에 着工(착공)하여 10월 落成(낙성)하였는데 공사를 감독한 자는 孟鎭(맹진),同柱(동주),

    泰玟(태민),正柱(정주)이요 族意(족의)에 따라 내게 請文(청문)한 분은 永直(영직),在柱(재주)이다.

        내가無文(무문)하다고 辭讓(사양)은 했으나 請(청)이 갈절함으로 살펴보니 公(공)은 위남선생의 曾孫(증손)이요

    祖父(조부)인暉生(휘생)께서 잔성에서 보성으로 移徙(이사)하였다. 대대로 文獻(문헌)을 이어 호남의 名族(명족)이

    되었다.公(공)의 아들균은(진사)眉巖柳先生(미암유선생)과 道義之交(도의지교)가있었다. 그의孫子(손자)에 이르러

    삼형제가 모두 진사이다. 家學(가학)을 어어 받으니一門(일문)에 세 豪傑(호걸)이 출생하였다고  한다.

       그후로 자손들이 더욱 번창하여 후손이 수천명이나 된다 忠孝(충효)와 文學(문학)이 계속 이어지니

    아! 公(공)의깊은 仁德(인덕)과두터운 은혜를 깊히 쌓아 새지 않은 일이니 어찌 發洋(발양)하고 양보함이

    이와같다 않으리요 지금 세상이 부모도 모르고 利(이)만取(취)하며 賊仁(적인)하고 害義(해의)한 자 천하에 가득하니  

    그누가 奉先孝恩(봉선효은)한 마음을 간직하랴? 이같은 대에 능히 睦族(목족)하고 협력하여 其先祖 齋閣((기선조재각)을

    이루고 가꾸니 참으로 寄特(기특)하도다 그러나 선조를 이어후손에게 넉넉하게 끼친 것이 모두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모름지기 先訓(선훈)을 깊이 생각하여  각각 이몸을 아끼고 밤낮으로 힘써 덕을 쌓고 어짐을 나타내 先代(선대)의

    아름다움을 빛냄으로서 父祖(부조)의 遺志(유지)를 받들었다고 할 것니 자손 여러분은 힘쓸지어다.

 

     -- 時重光赤奮若辛丑(시중광적분야신축)(1961년)之暮春者(지모춘자) 花山 權純  命記(화산 권순 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