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玉山齋(옥산재) 諱應斗,諱公禎齋室(휘응두, 휘공정재실) 전남 장흥군 장평면 녹양리계보 보기

玉山齋記(옥산재기)

       장흥군에서 북쪽으로 벽옥산  支峯下 鷹岩洞(지봉하 응암동)에는 吾族(오족)들이 10여대 이상을 살아오고 있는

    곳이다 말하자면 虞候公(우후공) 諱 應斗(휘응두)와 通訓大夫 公禎(통훈대부 공정)이 처음 터잡아 살면서부터 지끔까지

    3백여년이 지났지만 종족이 번성하지 못하고 家戶(가호)로 수백이 못되나 능히 孝思(효사)에 돈독하고 해마다 그 선조에

    闕享(궐향) 하지 않았다.

       通訓大夫 公禎(통훈대부 공정)과 夢日(몽일),夢辰(몽진),이하累代(누대)의 묘는 보성의 경계인 水多院先塋(수다원선영)

    아래 있고 그 向背(향배)는 비록 같지 않으나 염연한 모습은 父祖(부조)께서 堂(당)위에 계시고 자손들이  階下(계하)에

    列(열)지어 있는 것만 같다. 자손들이 재실을 경영해온지가 오래이나 힘이 부족하여 이루지 못했는데 다행히도 병무년

    봄에 門老(문노)인 性柱(성주)承柱(승주),炅植(경식),昌柱(창주)佶柱(길주),呈柱(정주)炯準(형준),炯虎(형호)등 10명이

    그 마을의 북쪽 1구에  터를 잡게 되었다.

       이곳에 큰 바위가 뾰쪽하게 서 있으므로 이르기를 鷹岩(응암)이라 헸다. 岡麓(강록)이 서로 안은 듯하며 風氣(풍기)가

    溫藉(온자)하여 남으로 程子川(정자천)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기으재에서 靈泉(영천)이 솟아 흐른다. 산은 벽옥산으로부터

    支峯(지봉)이 나뉘어 져서 비스듬이 이어 내려와서 斗峯(두봉)과 應峯(응봉),錦城(금성)등 諸山(제산)을 이루는데 여기에다

    한채의 집을 짓고 제도에맞게 3간으로 했다 매우 淨楚(정초)하면서도 앞이 탁틔여져 매년 草木(초목)이 단풍 질 때엔

    자손들이 이집에 모여 재숙도 하고祭需(제수)도 장만하며 선덕을 강론하기도 한다. 그렇게해서 선조묘에 제사를 바치면

    말없이 秦格(진격)<보람이 들어남>하실 것이고 英靈(영령)이 훤하고 양양하게 흠향하셨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경인년 兵火(병화)가 크게 일어났을 때 한마을의 민가가 거의 소실되어 버리고 이 옥산재도  또한

    모면하지 못했다 이로부터 중건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그 쌓인 한이 또 수년이 되어 버렸는데 지난 을미년 가을에

    門季(문계)인 聖基(성기)와祥均(상균)이가 분발하여 큰 힘을 담당해가지고 族黨(족당)들에게 상의도 하지 않고 홀로

    계획을 세워서 옛터에다가 좋은시기를 택하여 4간의齋(재)를 건립착공하엿다. 몸소 董役(동역)을 해가지고 수월내에

    완공을 보게 되니 아주 장대하고 미려하였으며 전에 지었던 집보다 더 나았다 산수도 새로워 보이고 림목도 더 빛이나는

     것만 같았다.

       이미 落成式(낙성식)을 갖고서 宗老(종노) 몇몇분들이 찾아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齋(재)에는 記(기)가 없을 수 없으니

    바라건데 자네가 그 전말을 좀 기술해서 훗일에 考徵(고징)할 것을 대비하게 해달라고하다 내 천박한 실력으로 외람되게  

    감당할 수 없으나 同宗(동종)의 誼(의)가 있어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위와같이 서술하고 이어서 일언하기를

    자손이된 분들은 마땅히 전일처음 경영하던 뜻을 본받고 또 금일 중건한 이의 정성을 생각해서 더욱 그 爲先(위선)과

    保宗(보종)의 생각을 돈독히 하면 거의 기재한 뜻을 저 버리지 않게 될 것임으로 이에 記(기)를 하는 바이다.

 

              --歲庚午(해경오)(1990년)  仲春之節(중춘지절)  朴 景 來(박경래) 謹記(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