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龍山書院 遺墟碑(용산서원유허비) 전남 보성군 미력면 덕림리 우와실(2004.9.27촬영)    계보 보기

▣龍山書院 巖刻(용산서원암각)          ▣龍山書院 遺墟(용산서원유허)

       보성 관아에서 곧장 북쪽으로10리쯤 가면 대룡산 아래에 고인이 된 문강공 죽전 박 선생 휘 광전의 용산서원

    빈터가 있다.아! 선생은 퇴계 이선생의 뛰어난 제자로 理氣(이기)에 밝았고 孝梯(효제)를 두루 행하여다. 정사를

    잘 보살피던 우리 穆陵(목릉)<선조 임금의 능>께서 儒術(유술)을 숭상하고 名器(명기)를 신중히 여기던 때에,

    <名(명)은 爵號(작호)를 말하고 器(기)는 車服(거복)을 말함 『後漢書(후한서)』「내흡전」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기와명을 신중히여기니, 名器(명기)를 신중히 여기면 아래백성들이 명령에 복종한다"고 하였다>추천으로

    淸選(청선)<淸宦(청환)의 후보자로 뽑음. 또는 그 뽑힌후보자>에 올라 내직과 외직을  두루거치면서 모두 훌륭한

    공적을 남겼고, 일찍이 胄筵(주연)<書筵(서연)과 같음.왕세자가 독서.강론하는자리.이연이라고도함>에서

    강의를 정밀하게 하여 임금의 장려를 받았으니, 이는 선생의 道學(도학)과 經濟(경제)<세상을 다스리는 경륜>의

    성대한 範圍(범위)였다.

       임진년(1592)과정유년(1597)의 액운을 만나 완강한 왜구들이 거듭 침범하여 미친개처럼 창칼을 휘둘러 모질 게

    구니, 선생은 당시 일흔의 나이에 두차례 모두 의병을 일으켜 적개심으로 공격하여 토벌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끝내 시기하는 자들에게 저지를당해 온 나라의 왜구를 말끔히 소탕하지 못하고, 병든 몸으로 의병장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순직하니,족히 千秋(천추)에 志士(지사)들의 눈물을 흘리게 할 만하였다.

       선생은 대질<70~80세노인>의 나이에 병든 몸으로 떨쳐 일어나 자신을 돌보지 않았고, 오직 임금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왜적을 섬멸할것을 맹세하였으며, 한 지방의 士氣(사기)를 고무하여 요충지를 방어함으로써 諸公(제공)들이

    끝내 中興(중흥)의 큰 공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왔으니, 이 또한 宗廟(종묘)<왕실과 국가>에 공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節義(절의)는 고금에 탁월하고 열렬하여초야에 숨어 살아가기를 탐하는<욕됨을 참으면서 삶을 훔지는 것,

    『宋書(송서)』「武帝紀(무제기)」를보면,"액운이 반드시 닥쳐온다면 나는 마땅히 죽기로社稷(사직)을 지키다가 廟門(묘문)에

    시체로 가로놓일지언정, 초야에서 살아가기를 구하여 멀리 숨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무리들을 대단히 부끄럽게 할 만하고,

    임금을 팔고 오랑케에게 빌붙은 역적들을 단호히 처벌할 만하니, 수백 년 전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늠름하여 아직도

    생기가 남아 있는 것 같다.

       아! 성대한 일이로다. 역대 조정에서 누차 증직하여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나,節惠(절혜)<시호를 내리는일>의

    아름다움을이룬 이는 金陵(금릉) 南公徹(남공철)과 雲石(운석) 趙寅永(조인영)이었다. 사림들은 院宇(원우)를 세워

    제향을 드렸는데 그일을주도한 이는 牛山(우산) 文康公(문강공)安邦俊(안방준)과 蘭谷(난곡) 鄭佶(정길)이니, 두 분은

    모두 그의 문인이었다.

       肅宗(숙종)정해년(1707)에 二憂堂(이우당) 忠翼公(충익공)趙泰采(조태채)가 유림의 상소에 근거해 扁額(편액)을

    내려줄 것을 啓請(계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앞뒤로 서원을 관장한 이는 遂庵(수암)權尙夏(권상하),丈巖(장암)

    鄭澔(정호),疎齋(소재)이이명,歸樂堂(귀락당),李晩成(이만성),寒竹堂(한죽당),신임,도암,이재,삼산재,김이안,

    梅山(매산)洪直弼(홍직필)등 여러 현인들과 우리 집안의 寒溪(한계) 尙書公(상서공) 閔泳穆(민영목)이었다.

       朝野(조야)에서 이처럼 지극하게 崇奉(숭봉)했건만 高宗(고종)신미년(1871)에 조정에  명령에 따라 撤享(철향)되니,

    사람들은지금도 사모의 정을 그치지 않고 있다 이에 安玉淳(안옥순),朴濟鉉(박재현),朴泰時(박태시).任泳鎰(임영일)

    등이 장자 비석을 세워세상에 표시하려고 鄭毅鉉(정의현)을 서울로 보내 나에게 글을 청하여 기록하고자 아니,

    이 또한 常道(상도)를 굳게 지키려는天性(천성)임을 속일 수 없다. 아! 百世(백세)후에 이곳을 지나는 지들은 오히려

     탄식하면서 반드시공경할지어다.때는 기사년 (1929)초여름이다.

 

                 --嘉義大夫(가의대부)吏曹參判(이조참판) 겸 內閣 直提學(내각 직제학)

                            侍講院 檢校 輔德(시강원 검교 보덕) 驪興(여흥)閔丙承(민병승)이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