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朴氏14世 諱 光前(휘 광전)전남 보성군 겸백면사곡리 양지마을(모래실)(2004.9.27촬영)    계보 보기

            진원박씨 성지 (문강공 죽천선생 전후6세묘,신도비, 부조묘<사당> ,화산재 종댁등이 집성되어있음)

       모래실 성지 동문비          죽전선생遇溪記(우계기)초본수묵        遺墨(유묵)瀟湘夜雨圖(소상야우도)                             문집 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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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諡號敎旨(시호교지)                                          朱子書節要(주자서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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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행장)             

        선생의 성은 박이요 휘는 光前(광전)이요 자는 顯哉(현재)요 竹川(죽전)은 그의호이다.선계가 珍原縣(진원현)에서

    나왔는데 고려조에 문하시중을 지내고 益陽伯(익양백)에 봉해진 忠義公(충의공) 瞻(첨)의 후손이다. 본조<조선조>에

    이르러 익양백의 증손으로 藝文館直提學(예문관직제학)을 지낸 熙中(희중)은 草書(초서)와 隸書(예서)에 능숙하여

    명성이 황조<명나라 조정>에 가득했다.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능히 信義(신의)를펼쳐 보임으로써 공정<태종>

    대왕에게 커다란 신임을 받았으나, 곧은 섬품 때문에 집정<나라의 정권을 잡은 사람>河演(하연)에게 미움을 사, 진원현

    城上洞(성상동)으로 물러나 노년을 보냈다. 그의 큰아들 생원 暉生(휘생)은 보성에 사는 綾城縣令(능성현령)宣時中

    (선시중)의 딸에게 장가를 든 인연으로 그 고을에 살 게 되어, 마침내 보성사람이 되었으니 이분이 선생의5대조이다.

       고조는 사온서 직장을 지낸 文基(문기)요.

    증조는 성균관 생원 胤原(윤원)이요, 할아버니는 宣敎郞(선교랑) 간 이다. 아버지는 성균관 진 而誼(이의)요 ,

    어머니는 宜人(의인) 崔氏(최씨)로 講隸院 習讀(가예원습독) 命夔(명기)의 딸인데. 嘉靖(가정) 병술년(중종21,1526년)

    정월 16일 寅時(인시)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태어나면서 아름다운 자질을 지녔으며 성품이 순수하고 온유하였다. 어려서부터 장난을 치며 놀 때에도 범인과

    달랐고 나이8~9세쯤되어서는 이미 어른다운 몸가짐을 보였으며, 성품이 또한 총명하였다.

       당시에 相公(상공) 洪暹(홍섬)이 흥양<지금의 고흥>고을에 귀양을 왔는데,진사공이 선생으로 하여금 洪相公

    (홍상공)에게 수업하도록 하였다. 선생이 寓居(우거)하던 집에서 홍상공이 거처하던 곳까지 거리가 거의10리

    남짓되었으나, 선생은 매서운 추위와 찌는 더위에도 걸어서 왕래하며 일과를 빼먹지 않으니, 홍상공이 그의 독실한

    뜻을 가상히 여겨 더욱 부지런히 가르치고 타일렀다. 또 부인을 시켜 머리를 빗기고 낯을 씻겼는데 마치

    자기의 아이를 쓰다듬듯 하였다.하루는 아버지 진사공이 선생에게 詩(시) 두 句(구)를 짓도록하고 ‘道(도)’자로

    시작하여 ‘爲(위)’자에 그치게 하니, 선생은 곧 응답하기를 “도는 천명에서 나오니 어찌 사람에 의한 것이랴?

    [道自天命豈人爲](도자천명개인위)”하였다. 또 ‘爲(위)’자 시작하여‘ 道(도)’자에 그치게하자 선생은곧 응수하기를

    “한번 크게 공자의 도를 이루리라[爲一大成孔子道](위일대성공자도)”하니, 부형들이 몹시 기특하게 여겼다.

       10여세가 되니 진사공은 과거공부를 급선무로 여겨 선생에게 사장<詩文(시문)을 짓는일>에 힘쓰라고 독촉하였다.

    선생은 일과를 마친 여가에 몰래『性理大全(성리대전)』을 취하여 마음을 가라 않히고 깊은 뜻을 탐구하여

    자못 얻은 바가 있었다.

       13세에 文理(문리)에 밝게 통하여 글을 읽되 스승과 벗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당시는 己卯士禍(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마다理學(이학)을 꺼리고 다투어 부화<화련한 문장공부>를 숭상했다.

    그러나 선생은 홀로 과거공부를 하면서도 이른 바 위기지학<자기를위한학문,곧 이학>이있음을  알고 깊이 사색하여

    풀어냄으로써 성취한 바가 날마다 진보하였다.

       20세이후에 비로소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길은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보다 나은 게

    없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과거시험장에드나들어 발표할 때마다 합격하지 않음이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과거에만 전념하지 않고韓胤明(한윤명)과 더불어

    경전의 옛뜻을 토론하느라 1년 동안 함께 공부하면서 우뚝한 모습으로 단정히 앉아 한밤중까지촛불을 밝혔고,

    닭이 울면일어나 세수한 뒤 서로 경계하고 책망하면서 학문을 독실하게 연마하였다.

       기미년(명종14,1559년)여름에는 벗들과 천봉산에 머물렀다. 講習(강습)하는 여가에 臺(대)를 샇고 연못을 파서

    학문하며 노닐곳으로 삼았는데仙家(선가) 삼청<道家(도가)에서 신선이 사는곳이라고 하는 玉淸(옥청).上淸(상청.

     太淸(태청)의 삼부>경계처럼 별도로 하나의 구역을 만들어 오르고 내리며 떨어뜨리고 올림에 모두 일정한 규범을

    두니,일상의 유희에도 또한 망령되거나 잡스럽지 않음이 다 이와 같았다.

       병인년(명종21,1566년)겨울에 비로소 퇴계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었는데, 퇴계가 한 번 보고서

    知己(지기)로 허락하였다.

    그때 퇴계는 바야흐로『朱子書節要(주자서절요)』를 초록하면서 선생에게 말하기를“학문을 세우는 기초는 오로지

    朱問(주문)<주자의문하>에 있다”하며 수업을 허락하였다.

    학업을 마치고 나서 선생은 오랫동안 定省(정성)<昏定晨省(혼정신성)의준말.밤에는 부모의 이부자리를 보살펴드리고

     아침에는 안부를 묻는 일.곧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도리>하지 못했기에 하직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이별할 즈음에 퇴계는 주자서절요 한질을 선물로 주고 또 詩(시)5수를 주며말하기를“外人(외인)<중이나 도사>의

    도에는 뜻을 두지 말라”하였다. 헤어진 뒤에도 누차 편지를 부쳐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뜻을 표했고,또 “스스로

    기초를 세워 세속에 빼앗기지 말라”고 가르쳤다.

    선생도 또한 그훈계를 유념하고      주자서 절요를 깊이 연구하여 늙어서도 쇠하지 않았다.일찍이 『質疑(질의)”

    한 권을 썼는데 많은 선비들이 베껴갔다.

       무진년(선조1,1568년)가을에 진사 시험에 제2등으로 합격했으나, 방목<합격자명단>을 부르기 전에 어머니의

    병환이 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남하하여 몸소 약을 다리고 주야로 곁을 떠나지 않았다. 돌아가시자

    상례.장례.제사를 한결같이 『주자가례』에 따랐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병이 많아서 사람들이 다 위태롭게 여겼지만 상복을 벗고 나서도 아무탈이 없으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지성스런 효도에 감응했기 때문이고 말하였다.

       경오년(선조3.1570년) 眉巖(미암)柳希春(유희춘)이 監司(감사)가 되었을 때, 임금이 불러 말하기를

    “본도<전라도>는 선비들의 소굴이니 경이 그들을 찾아내어 보고하라” 하였다. 미암은 본도의 경계에 이르러

    먼저 각 고을에 명하여 학행과 재덕이 있는 선비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진사 宣應直(선응직)등은 선생이 어버이를 모심에 효도를 다했고 상을 치르면서 예를 다했으며 몸가짐에

    법도가 있다고 적어서 올렸다.

    미암이 한 도의 뛰어난 선비 5명을 선발하여 임금께 아뢰었는데 선생이 선생이 첫 번째를 차지했고,선응직등은

    그 적임자를 천거했다하여 상을 받았다

       임신년(선조5,1572년)에는 전주의 慶基殿 參奉(경기전 참봉)에 제수 되었는데. 경기전이 全州府(전주부)안에

    있었고 후원에는 꽃과 과일이 많아娼妓(창기)와 잡다한 무리들이 밤낮으로 놀이터로 사용해온지 이미 오래되었다.

    선생은 말하기를 “경기전안에는 선왕의 遺像(유상)이 모셔져있으니 더럽힐 수 없다”하고 단호히 엄금하니

    재실이 정숙해졌다.

       계유년(선조6,1573녀)에는 獻陵 參奉(헌릉참봉)에 제수 되었다. 이전부터 이곳의 邑宰(읍재)는 관례대로

    참봉과 서로 짜고 사냥을 하여 포획한것을 나누어 왔다. 하루는 읍재가 사람을 시켜서 초청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陵寢(능침)은 사냥하는 곳이 아니며, 이권이 따른 일에는 더욱 따를 수 없다”하며,

    허락하지 않고 조금 뒤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버렸다. 이 해 가을에 진사공이 병으로 세상를뜨자

    선생은 무진년<모친상>과똑같이 상를 치렀다. 선생은 이미 양친을 다 잃고 벼슬에 뜻이 없어 어린 학생들을

    볼 적마다 독서를 권하되 『소학』을 먼저 배우게 하였다.

       경진년(선조13,1580년)가을에는 東氷庫 別坐(동빙고별좌)에게 제수되어 마침내 대궐로 달려가 謝恩肅排

    (사은숙배)하고 돌아왔다.

    때마침 왕자가 취학하게 되었는데 조정은 중전이 이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였으므로 謹愼(근신)하고

    純正(순정)한 사람을 택하여 輔導(보도)의 책임을 맡기게 되었다.

    결국 선생을 추천하여 사부로 삼고 河洛(하락)을 副師(부사)로 삼았으나, 하락은 많은 글을 강론

    하는데 힘썼고 선생은글을 정밀하고 명확하게 이해 하는데 주안점 두었다. 임금이 왕자의 독서를 살펴볼 때

    왕자가 이 점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글 읽는 것만 탐하면 뜻을 명확히 알지 못하게 되니,

    마땅히 朴 師傅(박사부)의 강의를 따라야 한다” 하였다.

       계미년(선조16,1583녀)여름에 임기가 만료되어 감찰로 옮겨 임명되었고, 겨울에 다시 咸悅 縣監(함열현감)

    에 제수 되었다.

    현에 도착한 뒤 씀씀이를 검소하게 절약하여 창고가 가득 넘쳐으며,일찍이 ‘다친 사람을 보살피듯이 백성들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긴다. 視民如傷(시민여상)’는 넉 자를 벽위에 크게 써 붙여놓고 자애롭고 편안하게

    다스리니,백성들이 모두 부보처럼 친근이 따랐다.공무를 마친 뒤에는 겨를을내어 몸소 학교로 찾아가서

    諸生(제생)들에게 경전과 역사서를 강론하였다.  선생은 젋어서부터 기쁘거나 화나는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집안에서는 일찍이 어떤 奴僕(노복)에게도 죄를 묻지 않았지만, 관직에 있을 때는 혹 문밖을 지나치게 드나드는

    자가 있어도 엄하게 매로 다스리며용서하지 않았으므로 관아가 숙연하였다.

    그래서 친척들은 말하기를“가정과 현을 다스리는데 두가지길이 있다”하였다.

       병술년(선조19,1586년)가을에 감사 아무개가 營婢(영비)<각 軍營(군영)이나 營名(영명)이 있는 관청에 딸려

     심부름하는 여자 종>에게 현혹되어 말만 하면 모두 들어주었고 여러 고을에서도 앞다투어 뇌물을 상납해 왔는데,

    그때에 아무개 全州 府尹(전주부윤)이 되어 군영의 여자 종에게 많은 미곡을 뇌물로 주었다.

    그 사실이 어사에게 알려지자 선생이 당일에 길을  떠나려고 행장을 꾸리면서 일정을 계산하여 양식을 넣고

    그 밖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창고의 곡식이 본래 숫자 외에 잉여분이 많게는 만여 섬에 이르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무도 이를 주관하지 않으면 아마도 허튼 곳으로 돌아가게될 것입니다. 청컨대 감사에게 보고 하여 국고에

    저장시키십시오”하였다.

    선생이 답하기를, “후임 현감이 어찌 감히 멋대로 사용하겠는가? 또(그대의 말처럼 한다면 자기의 공을) 자랑하는데

    가깝네. 이전에 梁子징(양자생)군이 거창으로 부임할 때 내가 전송하는 시를 지어 주기를, ‘백성들의 흩어진

    마음을 부르니, 화답하는 자  그 은혜를 따르네. 말고삐 당겨 어사에게 알리면, 칭송의 덕이 큰 비석에 새겨지리.

    이를 보는 자 곧 이마에 땀이 나고, 움츠려 병 걸린 듯하리라’ 하였는데, 내가 어찌 감히 이 말을 잊겠는가?”하고

    따르지 않았다. 돌아와서는 초연히 고향 산천을 노닐면서 스스로편안하게 즐겼으며, 집안살림이 늘 궁핍하여도

    괘념치 않았다.

       정해년(선20,1587년)에 掌苑(장원)에 제수 되었다가 도중에 또 懷德縣監(회덕현감)에 제수 되었는데, 현에

    잔존한 폐단을 다스리기 위해 경영할계획을 심사 숙고하여 함열에서보다 배로 노력하였다.

    어떤 종친이 촌민과 보비 문제로 송사를 벌였느나 여러해 동안 해결되지 못하고 이미11명의 관원이 바뀌었다.

    또 이것이 회덕으로 이첩되었는데 이전의 현감도 세력에 겁을 먹고 일부러 끌기만 했다.

        선생은 그 文籍(문적)을 열람하고精狀(정상)을참고하여 중론을 물리치고 촌민에게 승소판결을 내리니, 종친은

    스스로 권세를 믿고 司憲府(사헌부)에다 꾀여 바쳤다. 사헌부에서그 문안을 갔다 보았으나 曲直(곡직)이 분명하므로

    종친은 기가 꺾여 퇴장해 버렸다.

    또 어떤 여자가 후손이 없는 과부집의 종이 되었는데, 族姪(족질)간에 서로 다투다가 차지하지 못한 자가

    監司(감사)의 위세를 빙자하여 커다란 악행을 저질렀다는 명목으로 기어코 죽이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어찌 감사가 두렵다 하여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는가?” 하고,

    누차 원통한죄라고 보고하니 감사가 격노하여 순찰을 와서 선생을 불러다 놓고 질책하였다. 선생은 그 전말을

    열거하여 한계를 그어서 조목 조목 설명하니 감사가 부그러워 하며 승복하였다. 그 현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傷御史(재상어사)<재해로 인하여 곡식이 손상된 상황을 실제로 답사하고 감정하는 임무를 맡은 어사>禹俊民(우준민)

    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돌아왔다.

    설.삼복.납향<납일 곧 동지 셋째未日(미일)에 그해 일년동안의 농형을 여러신에게 고하는 제사>에는

    일가 어른들을 모아 즐겁게 노니 제법 江湖(강호)의 멋이 있었다.

    또 문중 사람들을 불러 의논 하기를,“선조의 묘소가 水多院(수다원) 산골짜기에 있는데 이미 연대 오래되어

    자손들도 소원해져서,각각 자기집 제사만 풍성하게 차리고 먼 조상에게는 힘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초목이 무성하게 우거져 다시 몇 해만 지나면 영영 찾을 것이니 매우 한스럽습니다” 하였다. 서신으로 통보하여

    노소를 막론하고 각자 제사지낼 제수를 준비하여 같이 성묘하고 제사를 마친 다음.廣灘(광탄)냇가로 옮겨 앉아서

    남은 음식을 같이 먹고 아울러 친목을 닦으니. 사람마다 기쁜 마음으로 흠모하였드며 다른 성씨들도 찾아와

    참여하였다.

       임진년(선25,1592년)에 왜란이 갑자기 일어나니 여러 고을들이 풍문만 듣고도 달아나 국가의 형세가 다급하여

    하루도 버티기 어려웠다.

    선생은 任啓英(임계영)과 함께 鄕兵(향병)을 모집하여 정예병 7백여명을 얻었지만, 선생은 노병으로 출전치 못하게

    되자 마침내 任公(임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錦山(금산)과 茂朱(무주)의 적을 무찌르고 星州(성주)와 開寧(개령)

    <지금 경북 금천시 개령면 지역>을 방어하는 데 모두 공을 세웠다.

       명나라 병사가 대거 도우러 오니 흉악한 왜적들은 영남으로 퇴각하였다. 東宮(동궁)이완주에 군사를 감독하러

    왔을 때에 선생은 병든 몸으로달려가 뵙고 또 詩事(시사)에 대해 언급할 만한 것 10여 조를 올리니 동궁이 가납하였다.

    이어 본도감사에게 명하기 “박아무개는 나에게 甘盤감반의은혜<옛 스승이 가르쳐 준 학문적 은혜 감반은 은나라 고종의

     스승으로 도덕이 뛰어난 사람>가 있으니 특별히 우대 하여 음식물을 나누어 주랴”하였다.여기서 며칠을

    머물다가 하직하고 돌아올 때 술을 하사하여 전송했다.

       갑오년(선조27.1594년)에 任公(임공)<임계영>이 선생의 의병을 일으킨 공로를 논하여 임금께 아뢰어 軍資監正

    (군자감정)을 제수하니, 선생은 말하기를“헛되이 國恩(국은)을 받아 3품에 이르니 마음이 실로 편치 못하다”하고

    장차 상소하여 아뢰려 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상으로 관직을 함께 받은 사람에게 미안할 뿐 아니라, 임공에게도 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하니,선생은 임공에게 소장을 올려 스스로 사실을 밝히도록 하였는데 備局(비국)<비변사>이 묻고 놓고

    거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자들은 이를 의롭게 여겼다.

       을미년(선조28,1595년)봄에 翊衛(익위)에 제수되었으나 노병으로 사양하였다. 동궁이 불러보고 情義(정의)를

    간곡하게 표하니, 선생은 배알하고 말하기를“신은 늙어 죽음이 가까우니 원컨대 학문을 강론하고 덕을 닦아서

    玉成(옥성)의 경지<완전한 덕을이룸>를 이루십시오”하였다.

    동궁이 가슴아파하며 말하기를 “사부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처음3년간 배웠던 것이 실로 많은 도움이 되어

    정의가 다른 사람보다 배나깊으오...”하였다. 돌아와서 냉 복통을 앓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배다 더했으나.

    항상 방 하나를 치우고 『주역』과『주자서절요』를 읽기를조금도 그치치 않았다.

    만년에 거문고를 좋아하여 항상 여기에 마음을 붙였는데,일가들이 “늙어 얼마나 괴로운가?”라고 물으면,선생은

    “내 스스로이것을 즐기니 피곤함이 없다”고 답했다.

       정유년(선조30,1597년)에 왜적이 또 본도를 침범하여 남원이 함락되고 길이 막혀 천봉산 골짜기에 은거하였는데

    혹자가 말하기를“적이 이미 서울에침범하여 大駕(대가)의 소재를 알 수 없으니 인심이 흉흉합니다. 심지어 왜적에게

    붙어 백성을 도륙하는 자도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많은 선비들이 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니  응모한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군사의 기세가 점차

    진동하게 되었다.산과 바다로 도망가 숨었던 여러 고을의 수령들은 그가 세운 공을 시기하더니 마침내 막고 나서서

    감사 黃愼(황신)에게 모함 하였다. 황신은 선생을 불러서 질문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진원<선조의묘소가 있는곳>에

    들렸다가 얼마후에 병을 얻어 세상을 뜨니 동년 11월18일이었다.

       配(배)는 淑人(숙인) 文氏(문지)로 贈 戶曹參議(증호조참의) 行僉使(행첨사) 亮(양) 딸이다. 성품이 온유하고

    생각이 깊어서 시부모를 효성으로섬기고 종들들 온화하게 대하였으며, 친척에겐 사랑을 다하고 궁핍한 자에겐

    구휼을 다하니, 사람들이다. 참으로 선생의 배필이라고 말하였다.불행하게도 선생과 한달 간격으로 잇달아

    세상을 떴는데 ,이때 병란이 매우 치열하여 차분히 장사를 치를 수 없었다.

       기해년(선조32,1599년) 가을에 동궁이 侍講院(시강원으로 하여금 본도 감사에게 諭示(유시)하여 賻儀(부의)를

    후하게 내리게 하고,沙谷(사곡)艮坐坤向(간좌곤향)에 합장케 하니 동궁의 은총이 지극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근효는 성균관 진사이며 좌의병으로 활약한 공으로 軍資監正(군자감정)에 제수되었고 후에

    또 장수 현감을 제수 받았으나 상복을 입고 있어서 부임하지 않았다, 차남 근제도 좌의병으로 활약한 공으로

    군자감 ,참봉에 제수 되었다.

       근효는 2남 2년를 두었으니 춘수는비로소 취학할 나이가 되었고 춘장은 어리며,장녀는 전부사 최경장의 아들

    홍유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같은 군의 전부사 임배경의 손자 희에게 출가하였다, 근제의 아드루 춘호는 軍資正

    (군자정) 양산항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장녀는 석천 임억령의 손자 의에게 출가하였으며 차녀는 같은군의

    진사박홍인에게 출가 하였다.

       아! 우리 호남은 본래 文獻(문헌)의 고장으로 불렸다. 고려 말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던 자는 오직 김하서(김인후),기고봉(기대승),이일재(이황),유미암(유희춘) 그리고 우리 선생뿐이다.

    河西(하서)의 학문과 操行(조행), 절의와 문장은 높아서 따를 수 없고 高峰(고봉)의 명쾌한 의논이나,

    一齋(일재)의 강하고 굳세어 굽히지 않음이나, 미암의 넓은 지식과 많은 문견도 또한 세상에서 보기 드문일이나,

    실천의 독실함을 논하자면 저 세분 현인이 우리 선생과 더불어 누가 더 나은지 모르겠다.

    다만 이름과 지위가 미치니 못하여 세상에 아는자 없으니어찌 개탄하지 않으랴? 이것은 아는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지 俗人(속인)들과 더불어 말하기는 어렵다.

       아! 선생의 세계와 출처는 이제 장수공<죽천의 큰아들 근효>의 집에 소장된 옛 초본을 보고 다시 빼기도 하고  

    윤색하기도 하여 그 큰 줄거리를 간략히서술하였다.언행에 대해서는 나 같은 옅은 견문과 엷은 식견으로는

    그 만에 하나도 형용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廣灘(광탄)선장<죽천의 문인선정달. 광탄은 그의 호이다>이 저술한

   『遺事(유사)』를 함께 아래에 붙여서 훗날 그의 언행을 명확히 분별할 줄 나는 君子(군자)의 채택을 기다릴 뿐이다.

 

       --모년 모월 모일에 문인 通政大夫(통정대부) 工曹參議(공조참의) 安邦俊(안방준)이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