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華山齋(화산재)

  文康公 竹川 諱光前齋室(문강공 죽천 휘광전재실)전남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양지마을(2004.9.27촬영)

 

        진원박씨 성지                    화산재 배경                            본채                                  현판                              안내

                                부조묘(사당)          

 

 華山齋와 祠堂( 화산재와 사당) 重建顚末(중건전말)

       보성읍에서 동쪽으로 20여리에 있는 沙谷(사곡)은 天地神明(천지신명)이  保佑(보우)할 文康公 竹川 朴先生(문강공

    죽천 박선생)의永世不廢地(영세불폐지)이다. 蘆嶺(노령)에서 천여리 산줄기를 치달아온 峻嶺(준영)이 우뚝솟아  金華山

    (금화산)<草巖山(초암산)>아래구비쳐 흐르는 보성강이 天然調和(천연조화)를 이룬곳 겸백 사곡에 문강공 죽천선생의  

    묘소와 부조묘(사당)<나라에 큰 功勳(공훈)이 있는 사람의 神主(신주) 모셔 永久(영구)히 제사 지내게 하는사당> 및 華山齋

    (화산재)가 있다.

      文康公 諱 光前(문강공 휘 광전)은 조선 中宗(중종)21년丙戊(병무)1526년에 사곡 남쪽 20여리 밖의 鳥城(조성)龍田(용전)

    에서 태어났다. 일찍 학문이 뛰어나 退溪先生(퇴계선생)의 高弟子(고제자)로 節義(절의)와 踐履(천리)가 篤實(독실)하여

    王子帥傅(왕자수부)와縣監(현감)등을 지냈으며 壬辰 丁酉兩亂(임진 정유양난)에 늙은 몸으로 奮然(분연)히 擧義(거의)하고

    督戰中(독전중) 1597년 72세一期(일기)로 별세하니 遠近(원근) 諸儒(제유)儒宗(유종)을 잃었다고  哀痛(애통)해 하였다.

    7년 倭亂(왜난)이 끝남에 왕실은 國地師    (국지사)를 보내어 이곳 吉地(길지)<초중장타 -풀속에 뱀이 사리고 있는형국>를

    택하여 幽宅(유택)을 정하고 侍講院(시강원)에서는 本道(본도)감사로 하여금 지방관원들과 함께 厚(후)하게 治葬(치장)케

    하였다.

      아! 슬프도다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하고 憂國如憂家(우국여우가)』<임금을 근심하기를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를

    금심하기를 집안일 같이근심>한 忠節(충절)이 아니었던가?  그후 後學(후학)들이 옛 講學所(강학소)인 大龍山麓(대용산록)에

    龍山書院(용산서원)을 세우니 朝廷(조정)에서는 賜額(사액)하고 墓下(묘하)에 부조묘를 세워 享祀(향사)케 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음력10월18일에 선생을 부조묘(사당)에서 제사를 끊이지 않고 모셔왔다.

       그 아래에 또 재실이 있어 齋號(재호)글씨는 선생이 특히 專心(전심)한 朱書(주서)에 인연한 朱子(주자)의 끌씨를

    集字(집자)하여 걸었다. 부조묘(사당)와 화산재의 槪況(개황)은 4백년간에 걸쳐 數次 改補修(수차 개보수)해 왔으나

    심하게 毁損(훼손)되어撤去(철거)하고 새로이 重建(중건)코자 都有司 (도유사)泰璿(태선),掌財(장재),泰時(태시) 및 각파

    유사들이 노력으로 우선 一棟三間(1동3간)의 사당을 중건하니 때는 1935년 초여름 이였다. 그러나 곧이어 화산재

    重建(중건)에 착수 하려던 차에 일제의 탄압이 날로  극심하여 중지하고 있던중 光復後(광복후)1954년 봄에 어려운

    사정속에서도 도유사 元在(원재),掌財(장재),淅柱(석주)(효준)에게 이 重大事(중대사)를 일임하여 竣功(준공)을 보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각파 유사들의 노력은 물론 全門族(전문족)의 정성과 道內 儒林(도내유림)

    들의 협찬이 한데 얽혀 완성되었는데 一棟三間(1동3간)의 겹집에 前三間(전3간)은 대청 후3간은 방으로 精巧(정교)하게

    꾸며졌다.

        이 부조묘(사당)와 화산재는 오직 충효와 學德(학덕)으로 일생을 마친 文武兼全(문무겸전)의 巨儒(거유)며 愛國志士

    (애국지사)이기도한선생의영혼이 담긴 독<神主(신주)모신상자>이 지금도 후손들의 盛華(성화)를 낱낱히 지켜보시고

    계신 듯 하다. 이에 感應(감응)한 듯 子子孫孫(자자손손)은 「事死如事生(사사여사생)하고 人依於神(인의어신)하며

    神感於人(신감어인)」<죽은이의 섬김을 살았을 때와 같이 섬기고 사람은 신에게 의지하고 신은 사람에게 감명한다>이라는

    신념으로 제사를 모시고 이 재실을 維持(유지)관리해 오고 있다.

       이 光明天下(광명천하)에 우리의 갈길을 밝혀 주신 선대의 영혼에 어찌 하루인들 보은을 잊을 수 있겠는가?

    모두 다 같이 참여하여 塋域(영역)과 廟堂(묘당)을 더욱 빛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이 부조묘(사당)와화산재의 由來(유래)를

    밝히게 됨은 때마침 우리 대종회의宿願事(숙원사)였던 宗誌(종지)를 편집하고 문헌들을 등재하게 됨에 宗門(종문)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감히 這間(저간)의顚末(전말)을 간략하게 기술하는 바이다.

 

                         ---庚午(경오)1990년 季冬(계동)     十六世孫  鎔澤  謹述  (16세손 용택 근술)

 

珍原朴氏14世 文康公 竹川 諱光前 墓碣銘 幷序(문강공 죽천 휘광전 묘갈명 병서)

  14세 문강공죽천지묘      13세 성균진사이의지묘       12세 선교랑생원간지묘        15세 장수현감근효지묘      17세 종사랑요천지묘

       退陶(퇴도)<퇴계이황>의 문인 중에서 현명한 사람으로 호남에 박공 광전이 있었으니, 자는 顯哉(현재)요 竹川(죽천)은

    그의 호이다

    그 선계는 진원현에서 나왔는데 조선조 초에 直提學(직제학)을 지낸 熙中(희중)이 있었고 그의 아들 생원 暉生(휘생)은

    보성으로 장가 들게되어 자손들이 그대로 살게 되었다. 고조 文基(문기)는 진사로 사온서 직장 벼슬을 지냈고, 증조

    胤原(윤원)은 생원 이었으며 할아버지 간은 宣敎郞(선교랑)이었고, 어버지 而誼(이의)는 진사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하여 父兄(부형)들이 과거공부를 하도록 명하였는데, 뜻이 달라 즐겁게 여기지 않았다.

    틈틈히『性理大 (성리대전)』을  취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은 뜻을 탐구하여 흔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己卯士禍(기묘사화)이후로  士大夫(사대부)들이 道學(도학)을 말하기를 꺼렸으나, 공은 능히 떨쳐 일어나 스스로

    서니 그 의지가 참으로 높았다. 그리고 뒤늦게 비로소 退陶(퇴도)의문하에서 학업을 청하였는데, 선생은 바야흐로

    손수『朱子書節要(주자서절요)』를 초록하면서 공에게 말하기를 “이책이 학문을 하는데 뿌리와 기초가 된다” 하였다.

    이별할 즈음에 詩(시)5수를 주며 매우 간절하게 학문을 권장하였다.

       윤경<명나라 목종의 연호>무진년(선조1, 1568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眉巖(미암)柳希春(유희춘)이 감사가 되어

    인재를 찾아 나서 공을천거하여 왕명에 부응하니, 慶基殿 參奉(경기전 참봉)에 제수 되었고 獻陵 參奉(헌릉 참봉)

    으로 옮겼는데 조금후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다시 東氷庫別坐(동빙고 별좌)에 제수 되었다. 당시 나라에 대를

    이을 동궁이 없었으므로 왕자를 輔導(보도)하는 일을 급선무로 여겼다. 공과 河洛(하락)이 사부거 되었는데 강의할

    때마다 하락은 많이 읽도록 하는데 힘썼고 공은 글을 정밀하게 이해하는데 힘썼다.

       선조 임금께서 왕자의 독서를 점검하면서 말하기를,“많이 읽기만 하면 뜻에 정밀하지 못하니, 마땅히 박사부의

    뜻을 따라야한다”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 감찰로 옮겼다가 다시 咸悅縣監(함열현감)으로 나가 자애롭고 편안하게

    다스리니 백성들이 모두 부모처럼친근히 따랐다. 공무를 마친 뒤에는 겨를을 내어 鄕學(향학)으로 찾아가서 고을의

    자제들을 불러모아 강론하였으나. 方伯(방백)의 뜻을거스르는 일 처리로 인해 파직되었다. 후에 掌苑署(장원서)를

    거쳐 懷德縣監(회덕현감)이 되어 송사를 처결하면선 권세가를 두려워하지않았고 또 상관의 뜻을 구차하게 따르지 않아

    곧 파직되어 돌아왔다.

      임진년(선조25, 1592년)의 국난에 任啓英(임계영)과 함께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였고, 왕세자가 군사를 감독하러

    남쪽으로 내려 왔을 때에 공이 나아가 뵙고 詩事(시사)에 대해 10여 조를 개진하였다.

       국난이 평정되자 군량을 모은 공로로 인해 軍資監正(군자감정)에 제수 되었는데, 공은 수심에 잠겨 말하기를

    “공로도 없는데 감히그상을 편안히 받겠는가?”하고, 임공에게 스스로 시실을 밝히도록 하였다. 마침내(비변사에서)

    묻어놓고 거행하지 않았드나 識者(식자)들은 이를 의롭게 여겼다. 翊衛(익위)에 제수되니 한번 謝恩肅拜(사은숙배)

    하고 돌아왔다.

       정유년(선조30,1597년)에 왜구가 또 호남을 침범하자, 고을사람들이 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니 공은 “내가 비록

    늙어으나 감히 한 번 죽기를 아끼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부인 문씨가 난리중에 세상을 떳고 공도 또한 병이

    위독했지만, 오히려 능히 충의를 떨치니 군사의 기세가 점차 진동하게 되었다. 새나 짐승처럼 도망쳐 숨었던 고을의

    수령들은 그가 세운 공을 시기하여 도리어 막고 나섰다. 얼마후에 세상을 뜨니 이 해 11월18일이었고 향년은 72세였다.

    본군의 沙谷 艮坐(사곡 간좌)언덕에 장사를 지냈고, 후에 左承旨(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공은 내면의 행실이 순수하여

    부모를 섬김에 조금도 그 뜻을 어긴적이 없었고 늙어서 喪(상)을 치를 때도 더욱 진실하였으며, 선조를 받드는데

    독실하였고 친족에게 돈후하였다. 평소에 규모와 법도가 매우 근엄하였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물을 접하여 和氣

    (화기)가 넘쳐흐르니 어진 이나 어리석은 이나 모두 싫어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을 위한 학문에 힘을 기울여 축적됨이

    이미 두터워지자감추어도 더욱 문채가 빛났다. 사람을 가르칠 적에『小學(소학)』을 앞세웠고 상례나 제례는 모두

   『家禮(가례)』를 따랐다.

    한결같이 朱子(주자)의 학문을 본보기로 삼았는데 선생이 일찍이 전수한『朱子書節要(주자서절요)』한 질을 공은

    몸이 다하도록 읽고

    외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質疑(질의)』한 책을 남겼는데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숙부인 문씨는 진사로 參議(참의)에 추증된 亮(양)의 딸이다. 아들 根孝(근효)는 行(행) 長水縣監(장수현감)으로

    司憲府 執義(사헌부집의)에 추증되었고, 根悌(근제)는 參奉(참봉)이다. 손자 春秀(춘수)는 行(행) 宗廟署 直長

    (종묘서 직장)으로 承政院 左承旨(승종원좌승지)에 추증되었고 春長(춘장)은 진사이며 春豪(춘호)는 察訪(찰방)이다.

       증손에는 진형,익형,비형,동형,제형,유형,태형,세형,만형이 있고,사위로 顯達(현달)한 사람은 判書(판서) 李光迪

    (이광적)이다. 나머지는 다 싣지 못한다. 공이 세상을 뜬지 어언 백여년이 지나 성취한 덕이 깊은지 옅은지를 쉽게

    엿볼 수 없었는데, 門人(문인)이 서술한 글이 오히려 믿을

    만했다. 牛山(우산)安邦俊(안방준)이 호남의 名儒(명유)를 논하면서  河西(하서)<김인후>를 으뜸으로 꼽고,

    高峰(고봉)<기대승>,一齋(일재)<이항>,眉巖(미암)<유희춘>과 공을 그 다음으로 ㄲ 꼽았다. 그의 말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한 것이 아니었는데, 공을 칭송하면서또“실천이 독실하였다”하니, 아! 공과 같은 이는 어찌 옛날에

    이른 바‘그 선생에 그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어서 銘(명)을 붙인다.

       퇴계 선생의 학문은 실로 주자에 근본하니 한 질의「주자서절요」가 바로 그분의 종지였네 무었을 전수 하였던가

    자신을 위해 학문하라 하네 공이 분발하여 받아들이니 小子(소자)들 닮은 이 없네 誠直(성직)을 쌓은 한 마음이 거의

    여기에서 이루어지니 다급하여 넘어지더라도 죽을 때까지 힘을 다하였네 내가 그행동을 살펴보니 효도는 시종 변하지

    않았고 의리로 임금을 떠받들었으며 충성하여죽음을 아끼지 않았네 사람의 커다란 도리는 결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배운 바를 저 버리지 않았으니  아! 참으로 어질었도다.오직 공의 덕과 행실은 근원과 여줄까리가 있으니

    나는 牛老(우로)를 증거 삼아 그 아름다움을 높이 게시하노라.

 

          --무오년(1738)늦겨울에 嘉義大夫(가의대부) 原任(원임) 司憲府 大司憲(사헌부대사헌) 兼守(겸수)

                                                         弘文館 大提學(홍문관 대제학)李縡(이재)가 銘(명)을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