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石齋(성석재) 諱應三齋室(휘응삼재실)   전남 장흥군 용산면 원기리          계보 보기

聖石齋記(성석재기)(성석재기 미비로 유허비문으로 대치함)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20리밖 語山(어산)의 石亭(석정)은 곧 主薄(주박)이신 朴公應三(박공응삼)께서 講學(강학)하던

    곳이었는데 그 정자가 허물어지고 터만 남아 있는지도 4백년이 되었다. 지금에 와서 후손된 사람들은 그 유허를

    오락가락 방항하며 돌을 다듬어서그 사실을 기록하려고 하니 詩(시)에 이르기를「桑梓(상재)나무만 보아도 반드시

    공경하였다」고 했는데 하물며 선조께서  嘉遯(가둔)<정도에 알맞은 은퇴>하시던 남긴 자취를 방임하고 없어지게  

    방치해 버릴 수 있으랴? 대개 정자와樓台(누태)는  때에 따라 흥하고 폐할수도 있으나 아울러 그 터와 이름마져

    나타내지 않으면 또 藏修(장수)<학문수습>하고 講學(강학)하셨던 곳을 어디에서 찾아볼 것이며遺風(유풍)과餘韻(여운)도

    따라서 수포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것은 아마 孝子慈孫(효자자손)드로서 이에 沒沒(몰몰)하며 참으로 몸둘바를

    몰라하는 지극한 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리라.

       공께서는 일찍이 天冠(천관),芙蓉(부용)등의 산수 좋은곳을 사랑하여 이곳에 정자를 지으려고 풀을 베어 터를 닦으매

    石礎(석초)가露出(노출)되니 전부너 공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으므로 石亭(석정)이라 이름하였다.

        공은 진원인이며 참봉 之樞(지추)의 아들이요 直提學 葦南 熙中(직제학 위남 희중)의 후손이니 대대로 그 미풍을

    이어오다 爲人(위인)이 강직하고 출중하며 효성과 우애가 천성 그대로였기에 伯氏(백씨)인 應斗(응두)를 섬김에도 더욱

    근신 하였다 또 그의 三從兄(3종형) 文康公 竹川先生(문강공 죽전선생)의 高足(고족)였다. 공은 그 교훈을 복습하여

    학문이 夙就(숙취)되었으며  그 훈시를 失墜(실추)않을까 하였다. 당시에 죽천 선생은 문제자들과 廣灘川(광탄천)위에서

    도학을 강론하니 그 풍류의 장원함과 絃通(현통)<거문고와시읊음>의 樂(락)은 일시에 성덕이 높았다 공께서는

    再從兄(재종형)應虎(응호)와 같이 그곳에서 實(실)로 서로 선후를 넘봤으니 선생께서 소중히 보이지 않고서는 어찌

    이와같이 될 수 있겠는가? 임진년 왜적의 날리에는丁盤谷(정반곡)景達(경달) 과文楓菴(문풍암)緯世(위세)와 李淸江昇

    (이청강승)과 金軒軒軒汝重(김헌헌헌여중)과 더불어 선생을 따라 倡義(창의)하게 되었는데 공으로 하여금 鄭松江(정송강)

    도체찰사의幕府(막부)에 參畵(참화)<계획에참여함>하게 되고 의곡 300석을 배로 운송하여 전공(克捿극서)을 도왔고 이에

    그 공노로 大護軍(대호군)으로 승급되었다. 嘉靖(가정)庚子(경자)(1540년)에 生(생)하고 萬曆(만력)甲辰(갑진)(1604년)에

    卒(졸)하니同面(동면)의 長提院(장제원)에 葬事(장사)하였다.  아!  공께서는 일찍이 山水(산수)와 亭臺(정대)의 사이에서

    시를 읋고 배회하며俗世(속세)에 超然(초연)해서 일생을 마치려는 그 高邁(고매)한 지조였음을 가히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마침내 나라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敵愾(정개)한 마음을갖는 것은 아마도 불행했던 때를 만나 국가의 혼란과 민생을

    짓밟는 순간에조금도 걱저이 없는 것처럼 하고 멀리 떨어져서 隱淪(은윤)<세상을 피함>에만 고수 하였다면 어찌 공이

    師席(사석)에서 講明(강명)하신의미가 있다 하리요 璂鉉(기현)은 그 族公 泰璿(족공 태선)의 狀(상)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글을 요청함으로 이와같이 기술하였다.

 

                              --癸巳元月下浣(계사원월하완) 安東(안동) 金 魯 東(김노동) 지음